韓国:実は米軍がひき殺した女生徒二人の像
皆さんは既にご存知と思いますが、韓国が半狂して建てている慰安婦像と称する像の不可思議だった二点。
その1) 何故に左は空席なのか?
その2) 像の少女は何故に裸足なのか?
평화의 소녀상(위안부 동상)은 주한 미군 장갑차에 치여 목숨을 잃은 두 명의 여중생이 모델이다. 이 동상을 유용했다.
平和の少女像(慰安婦像)は、在韓米軍装甲車にひかれ、命を失った二人の女子中学生(シムミソンとシンヒョスン)がモデルである。この像を流用した。
A US military armored vehicle killed two 14-year-old South Korean girls.At that time, the girls' shoes had taken off, so they were barefoot.
像の通り、ひかれた時、少女たちの靴は脱げてしまったから、裸足となった。
本来、左の空席にもう一人の少女がいるはずだった。左の椅子が空席なのはこの理由による。
American citizens need to know the original purpose of the comfort women 's image. Originally, this comfort woman image was supposed to be set up in front of the Amelia Embassy.
A US military armored vehicle killed two 14-year-old South Korean girls on Thursday near the border between South Korea and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an incident which is making local residents worried about their personal safety. The two middle school students were struck when they walked to a friend's birthday party, police said The armored vehicle veered to the right edge of the narrow road without careful observation and killed the girls on the spot, according to the police.
この像は2014年ごろに韓国の反米活動家で彫刻家のキム・ウンソン、キム・ソギョン夫妻により製作され、米軍に抗議するためにアメリカ大使館前に置こうとしたが、アメリカが激怒したから引き下がり、御蔵入りとなっていた。
✩ ✩ ✩
このたび、日韓歴史問題を研究する米国人ジャーナリストが、慰安婦像製作ビジネスの裏側を明らかにした。それによると、像が一体できるごとに製作者の韓国人夫妻らは3万ドル(約340万円)ほどの収入を得る。像の製作数は増え続けており、これまでに約50体分の合計1億7000万円相当という意外な収入になっていることが判明した。
✩ ✩ ✩
(参考)
벌써 14년이 흘렀다. 미선 효순 추모비
すでに14年が過ぎた。 ミソン、ヒョスン追悼碑
2016-06-07
(序文省略)
하지만 이렇게 ‘다사다난’ 했던 2002년에 선정된 ‘올해의 인물’은 놀랍게도 평범한 학원 강사였던 김기보 씨였다. 그가 선정된 이유는 바로 그 해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열 다섯 살의 두 소녀 심미선과 신효순을 추모하기 위해 그리고 미군의 폭력을 꺼버리기 위해 촛불을 들자고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약속의 날’인 2002년 11월 30일 1만 명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교보생명 빌딩 앞으로 나왔고 주말을 거듭할수록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다.
しかし、このように「多事多難」の2002年に選ばれた「今年の人物」は、驚くべきことに普通の塾講師のギムギボ氏であった。
彼が選定された理由は、まさにその年の6月13日、米軍装甲車にひかれ死亡した十五歳の二人の少女シムミソンとシンヒョスンを追悼するために、米軍の暴力を排除するためにキャンドルを持とうと提案したからであった。
「約束の日」である2002年11月30日1万人がキャンドルを持って光化門教保生命ビル前に出て来て週末を重ねるごとにその数は急激に増えた。
12월 7일에는 5만 명, 12월 14일에는 최대 인파인 10만 명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섰다. 그러다 보니 2002년 겨울에 광화문 일대 상점 중엔 양초를 팔지 않는 곳이 드물었다. 노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12月7日には、5万人、12月14日には最大の人波である10万人がキャンドルを持って街に立った。そうして2002年の冬に、光化門一帯の店ではキャンドルを売っていないところが珍しかった。屋台まで登場するほどだった。(中略)
사고 5개월 뒤인 11월,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 군사법정에서 열린 재판에서 운전병 마크 워커 병장과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 병장은 무죄 평결을 받았다. 참았던 시민들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이 땅에서 벌이진 일, 이 땅의 법으로 해결하자.”,“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외쳤다.
こらえていた市民の鬱憤が一度に噴き出た。キャンドルを持って街に出てきた市民は「この地で起きたことは、この地の法律で解決しよう。」、「被害者はいるが、加害者がいないことでは話にならない」と叫ん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부당함을 우리 국민이 널리 알게 된 계기도 이 사건이었다. 22조 3항이 대표적인 독소조항이다. 주한미군이 공무 중 저지른 범죄에 대해선 우리 정부가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해도 미국이 거부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미국이 한국에 재판권 포기를 요청하면 ‘특히 중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재판권을 포기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이 사건의 충격파가 커지자, 우리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했지만, 그들은 거부했다. 이런 비상식과 불합리한 한미 관계가 수 만 명의 시민을 거리로 끌어냈던 것이다. 지금도 이 불평등한 협정은 바뀌고 있지 않다. 하지만 미군을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韓米駐屯軍地位協定(SOFA)の不当を私たち国民が広く知ったきっかけもこの事件だった。 22条3項の代表的な毒素条項だ。
在韓米軍の公務中犯罪に対しては、韓国政府が米国に裁判権放棄要求をしても、米国が拒否したら韓国に裁判権は無い。一方、米国が韓国に裁判権の放棄を要求すると、「特に重要な場合を除いて、裁判権を放棄する」と規定されている。
この事件の衝撃波が大きくなる今、私たちの政府は、史上初めて米国に裁判権放棄要求をしたが、米国は拒否した。このような非常識と不合理な韓米関係が数万人の市民を街に繰り出させたのである。
今でもこの不平等な協定は変わっていない。しかし、米軍を非難する前に、私たちは自分でできることをきちんとしているかどうか調べてみるべきだろう。
✩ ✩ ✩
미군은 사고 석 달 후인 9월 21일, 현장을 내려보는 작은 언덕에 추모비를 세웠다.
米軍は、事故三ヶ月後の9月21日、現場を見下ろす小高い丘に追悼碑を立てた。
(この節の原文省略と概略)
この追悼碑に刻まれてある英文(石碑下部の左半分)は、“We dedicate this memorial as a lasting symbol of our respect”で、訳すと「私たちはこの記念碑を私たちの尊敬の永続的なシンボルとして捧げています」なのだが、同時に刻まれた韓国語訳文(石碑の下部の右半分)では「許しと追悼の意を集めて、この追悼碑を立てて追悼の辞を捧げます。」とある。
問題は、韓国語訳では『許し』の文字が挿入されているのに、英原文には『許し』という文字は無い。つまりこの碑を建立した米軍の意向は『二人の少女を殺したが誰にも許しを乞う気は無い』ということだ。
✩ ✩ ✩
(中略)
참사나 비극을 되풀이 하지 말자는 다짐은 그냥 입에 올리는 말이고, ‘칙칙한 사건'의 흔적은 ‘영혼 없는' 추모시와 추모사를 새겨 눈에 띄지 않는 곳이나 그 놈의 땅 값 때문에 시비를 걸지 않는 공공용지에 쳐 박아 버리는 것이 우리의 ‘추모 문화'의 민낯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런 추모비 대신 시민사회 단체에서 새로운 추모비를 제작했지만 세우지 못하고 모처에 보관되어 있다. 이 추모비가 현장에 세워질 날이 빠를까? 한미 주둔군지위협정이 개정되는 날이 빠를까?
ここでよく知られていないエピソード一つを紹介して文を終えたい。この追悼碑の代わりに、市民社会団体から新しい追悼碑を制作したが、立てず某所に保管されている。この追悼碑が現場に立てられる日が早いか?韓米駐屯軍地位協定が改定された日が早いか?
捏造:従軍慰安婦問題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