ベトナムでの韓国軍の蛮行証言 한국군


한국군:베트남전 성폭력 피해자들 첫 증언

ベトナム戦争被害者2名が訪韓 証言報じた韓国メディア皆無
NEWS ポストセブン 6月26日(金)

처녀와 소녀들은 왜 한명씩 참호 속에 들어갔는가
(↓)
(발췌 )
“네 사람이, 한 명씩 돌아가며 내게 그 짓을 했어요.”
“참호에 한 명씩 집어넣고, 이틀 낮 이틀 밤을 가둬놓고, 연속적으로 강간을 했어요.”
베트남 중부 빈딘성에서 만난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의 이야기이다.
“너무 무서웠어. 너무 독악했어. 지금도 나는 여전히 당신들 한국 사람이 무서워.”
“따이한? 아이고, 나는 몰랐어요. 당신들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안 만났지.”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만나러 베트남으로 간 우리 일행은 그들에게는 두려움과 기피 대상인 ‘따이한’, 그들의 기억에 두려움과 독악함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따이한’이었다.


● 레티히에우(1935년생)

“무서워요 무서워요, 날 어디로 끌고 가려고”
“무서워.”
안년시(옛 안년현)에서 만난 레티히에우 할머니는 우리를 보자마자 첫마디를 그렇게 토해냈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무섭다며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 모습을 대하면서 한국에서 간 우리는 할머니와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자리해야 했다.

“옷을 벗기고, 난 너무 무서웠어.” 할머니는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심장이 뛰어서 약을 먹었다고 한다.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계속 “지금 너무 떨려서 말 못하겠어. 나 잡아가면 어떻게 해. 어디로 끌고 갈까봐 너무 무서워. 심장이 막…. 내가 안정을 취해야지, 안정을 취해야지. 한국. 무서워.”

“나 좀 살려주세요. 저렇게 아이들도 있는데…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었어. 총소리가 나고, 내가 애를 셋을 안고 있었어. 서너 명의 한국군이 들어와서 나를 잡고 머리에다 총을 댔어. 애들은 마당에 내동댕이쳐지고, 나를 뒷집으로 끌고 가서 강간했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너무 무서워서 눈을 감고 있었는데 한국군들이 내 옷을 벗겨서 내 얼굴을 가렸어. 아이고 무서워.”

● 하티낌응옥(1935년생), 하티찐(1929년생) 자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숲이 흔들리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숲이 흔들렸어요. 누군가 외쳤어요. 한국군이다. 한국군이다. 숲이 흔들린 것이 아니라 한국 군인들이 온몸에 풀과 나무로 위장을 하고 오고 있었던 거예요.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지만 결국 잡히고 말았어요. 언니와 올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잡혔어요.” 두 자매와 올케는 한국군에게 잡혀 뚜이프억현의 푸꽝촌 한국군 부대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우리 셋을 베트콩 잡으러 가자며 따로따로 끌고 나갔어요. 그런데 풀숲으로 끌고 갔어요. 베트콩 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강간하러 간 거죠. 한 사람은 이쪽 풀숲에, 다른 한 사람은 다른 풀숲에 끌고 가 강간했어요. 그러고는 다시 언덕으로 끌고 가서는 비시(VC, 베트콩)! 비시! 하고 소리쳤어요.” 동생이 증언을 계속하는 동안 언니는 큰 눈을 끔뻑끔뻑할 뿐이었다. “저항도 할 수 없었어요. 막을 수도 없었어요. 한국군들은 키도 크고 덩치도 컸거든요. 혼이 다 달아나서 한국군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생각도 안 나요.” 강간을 당한 뒤 세 여자는 2박3일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응옥 할머니는 서른 살이 넘은 나이였다.

언니인 찐 할머니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는 그 풀숲에서 두 명의 병사가 내게 덤벼들었어요. 바지와 웃옷을 벗으라고 하더니, 낄낄거리고 웃고, 나를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고 하면서 희롱했어요. 그리고 강간했어요. 한 명이 하고, 그다음 한 명이 하고. 그러고 나서도 나를 돌려보내지 않고 나를 끌고 베트콩을 찾으러 갔어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찐 할머니를 초소로 돌려보낸 이후에 또다시 한국군은 찐 할머니를 끌고 나가 강간을 한 뒤에야 돌려보냈다. 올케도 함께 피해를 입었지만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그녀의 이름이나 피해에 대해서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의 마음도 전할 수 없었다.

● 응우옌티카인(1936년생), 응우옌티떰(1954년생) 자매
2박3일간 일고여덟번 끌려나가다

그길로 일곱 명의 마을 여자들은 묶인 채 끌려갔고, 가다가 마을이 나타나면 다시 수색을 해서 한 명을 다시 묶어서 끌고 갔다. 도착한 곳은 고보이 한국군 기지였다. 빈 건물에 여성들을 감금하고, 한 명씩 여자들을 불러내 눈을 가리고 뒤통수에 총을 겨눈 채 한국 군인들은 소리쳤다. “너 베트콩이지!” 그러면 여자들은 있는 힘껏 머리를 세 번 흔들었다. 그것이 끝나면 강간을 하고 풀어줬다. 그리고 그다음 사람도, 또 그다음 사람도…. 2박3일 동안 계속 반복해서 강간을 당했다. 하룻밤에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일곱, 여덟 번은 끌려 나간 것 같다고 한다.


“(함께 끌려간) 엄마는 너무 늙어서 강간을 당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무지하게 많이 맞았어요. 그때 우리도 많이 맞았어요. 총 개머리판으로 계속 맞으면서 강간도 당하고 그랬어요. 풀려날 때 걸음을 걸을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러나 살아서 풀려난다는 것이 너무 기뻐서 있는 힘을 다해서 걸었어요.”


● 응우옌티바이(1948년생)
손으로 펴보인 손가락 네 개의 의미는


● 팜티하인(1951년생)
혁명활동 때문에 고문과 성폭행 당해

● 팜티언(1951년생)
남편은 결국 자리를 피하다
“참호 속에 있던 그 군인에게 2박3일 동안 연속해서 죽을 때까지 강간당했어요.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낮에는 두 번, 밤에는 세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한국군이 옷을 벗으라고 하고 강간하고, 다시 옷을 입으면 벗으라 하고 강간하고, 또 옷을 입으면? 계속 반복했어요. 쌍꺼풀이 없는 눈이었고, 잘생기고 젊은 병사였어요.”

다시 올까 두려운 한국군…사죄와 보상 요구

한국군 성폭력 피해자들 외에도 안년시에서 우리는 한국군 ‘곽’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아 홀로 키워온 여성도 만났고, 푸깟에서는 한진건설 노동자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아 홀로 키워온 여성도 만났다. 이들 여성은 한결같이 버려졌다는 기억과 함께 그 아이들을 홀로 키우며, 베트남 사회에서 라이따이한이라는 낙인을 갖고 살아야 했던 고통의 시간들을 하소연했다. 아울러 아버지를, 형제들을 만나고 싶다며 우리에게 기대를 걸었다. 피해 상황은 다르지만 모두가 전쟁이 만들어낸 아픔이었다.

한국 군인들에게 강간과 고문, 성폭력을 당한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마주해야 했다. 언니와 올케와 함께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하티낌응옥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에게 희롱과 조롱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몇 개 했어?” 하면서 놀리기도 하고, 사람들한테 할머니가 있는 곳에는 가지 말라 하면서 따돌렸다. 그래서 할머니는 한국이라는 말만 들어도 입이 쓰고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